제7장 요한복음에 나타난 절기 명칭의 특징
3차로 이루어진 연간절기의 명칭을 부르는 데 있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특별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요한복음의 특징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신학자들이 이러한 요한복음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전 세계 신학자들과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요한복음(19:14)에 나타난 절기명칭의 특징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잘못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유월절 날짜에 대한 기록이 불명확한 것으로 어물쩍 넘기고 만다.
하나님의 절기가 한 점 오차도 없이 사도들에 의해 지켜졌음을 알고 있는 우리 예수증인회로서는 그들의 잘못된 해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한 장의 지면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공관복음은 1차 절기를 무교절이라고 불렀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앞 장에서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러한 용례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제4복음서로 일컫는 요한복음은 절기명칭을 사용함에 있어서 공관복음과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은 1차 절기를 부를 때 유월절이란 명칭을 사용하는데, 이는 공관복음이 구약시대의 관습대로 무교절을 사용하는 것과 다른 용례이다.
【요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요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공관복음이었다면 “유대인의 명절인 무교절이 가까운지라”라고 표현했어야 할 장면에서 요한복음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라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요한복음이 3차로 나누어진 절기명칭을 사용함에 있어서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특징을 보이는 배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공관복음과 달리 예루살렘 멸망 이후였다. 예수님 부활 승천 후 초기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교의 분파로 여겨졌고 사도 바울은 회당에 초청되어 설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곤 했다. 로마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초기 하나님의 교회를 유대교의 분파로 바라보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 후 제국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로마제국의 군대가 유대교의 반란과 폭동을 진압한 것이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에 대한 로마제국 내 반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유대교의 분파라는 이미지로는 복음을 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교와 차별화된 모습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했다. 요한복음이 유대교의 전통을 중시하기보다 헬라세계에 익숙한 철학적인 개념과 언어를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둘째, 요한복음의 구원관은 시간적인 개념을 사용하였다. 공관복음에서 공간적인 개념인 천국이라는 용어가 요한복음에서는 내세를 의미하는 영생이라는 용어로 바뀌어 사용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이라는 공간적인 개념의 구원이 공관복음의 주된 관심이었다면 요한복음은 영생, 생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다가오는 세대’ 즉 시간적으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을 로고스(말씀)라는 헬라철학의 개념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특징들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대교 전통에서 벗어나 헬라 문화가 지배하는 로마제국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세계화되어 가던 시대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그의 공생애 기간 전체를 고르게 조명하기보다 저자의 기록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적에 집중하고 있다.
셋째, 전술한 저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중에 새 언약 유월절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의 그리스도이심과 그를 통해 주어질 생명 즉 영생이 요한복음의 주된 관심사이다. 6장에 기록된 장문의 유월절 설교나 13장에서 16장에 이르는 마지막 유월절 밤의 설교는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기록이다. 요한복음의 무대는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기간의 행적이 주를 이룬다. 특히 해마다 유월절에 보여주신 행적과 말씀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이 3년간 주신 메시지 중에서 유월절에 주신 새 언약이야말로 백미를 이룬다는 점을 잘 깨달은 제자이다. 2장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사건을 처음 표적이라고 한 것도 유월절이라는 절기에 대한 요한의 독특한 관점 때문이다. 15장에 “나는 포도나무”라며 유월절 떡과 포도주에 담긴 이치를 설교하신 대목도 요한만이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예수님의 신성을 전하고 그를 통해 주어지는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유월절에 주신 새 언약이야말로 복음의 요체라는 점을 요한은 부각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기록 시기에 전도대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고 유대교 전통을 중시해야만 전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요한이 1차 절기 명칭을 유대인의 관습대로 무교절로 부르지 않고 유월절로 부름으로써 새 언약을 부각시키려고 한 점은 상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요한복음의 특징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요한복음 19장 14절에 나타난 “유월절의 예비일”이 정확하게 어느 날을 의미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요19:13-14】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 받은 1월 15일 새벽을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유월절이란 1월 14일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1차 절기 전체를 의미하는 대표절기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인 1월 14일부터 시작하여 무교절인 1월 15일 그리고 그 후 칠일간의 전체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예비일’이란 안식일을 예비하는 금요일을 지칭한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예비일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스큐에’인데 예외 없이 금요일을 고유명사처럼 부르는 말이었다. 이러한 용례는 요한복음 같은 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19: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요19:41-42】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이 금요일 즉 ‘예비일’이었음은 다른 모든 복음서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막15:42-43】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눅23:52-54】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마27:61-62】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요한복음 19장 14절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 받으신 날을 가리켜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날이 금요일 즉 예비일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술한대로 여기서 유월절이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서 유월절에서 무교절로 이어지는 절기기간 전체를 의미한 것이요 그중에서도 금요일이라는 뜻이다. NIV 성경번역이 이 구절을 ‘유월절 절기주간의 예비일’( the day of Preparation of Passover Week)로 번역한 것은 적절하다고 하겠다.
첨언하자면 연간절기인 유월절은 밤에 지키기 때문에 별도로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한 날이 필요하지 않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양을 잡는 것은 14일 해질 때이며 바로 그 밤에 유월절을 지키면 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애제자로서 총명하고 젊은 제자였다. 요한은 예수님 무릎에서 마지막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 제자였다. 그런 요한이 사랑하는 스승이 십자가에 죽은 날과 관련하여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을까? 요한이 다른 복음서와 날짜를 다르게 기록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 세계 신학자들이 유월절을 폐지시킨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수호하는데 앞장서서 요한복음의 기록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여 이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교부들의 시대에 있었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유월절 논쟁은 사도들의 전통을 무시한 로마교회의 도발이었다. 로마교회는 교권을 쥐기 위해 끊임없이 유월절 논쟁을 지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했다는 개신교 신학자들조차 요한복음의 특징을 외면한 채 유월절을 폐지한 카톨릭의 전통을 옹호하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으니 애통한 일이다.